그리그 생가 - 쿤스트홀 - KODE 2 & KODE 3
베르겐에서 마지막 날이다. 한 도시에서 4박을 해도 오는 날, 가는 날을 빼면 삼일 동안만 구경할 수 있으니 동선을 잘 잡아야 한다. 오늘은 그리그 생가가 있는 트롤 하우젠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베르겐에 삼일에 한 번씩은 비가 내린다는데 오늘도 쾌청... 아직 쌀쌀하니 바람맞이 쟈켓을 벗을 수가 없다. 노르웨이 와서는 거의 교복이다.
트램 티켓을 사는 곳도 물건 사는 곳도 다 자동판매기...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왜냐면, 직원이 없으니까. 북유럽에서는 현금을 쓸 필요가 없다. 혹시 몰라서 유로를 꽤 갖고 왔는데 간수하기만 번거롭다.
트램을 기다리다 뒤쪽 공원을 끼고 멋진 건물이 보인다. 날마다 이곳을 지나면서 저기는 무슨 건물일까 궁금했는데 저곳이 미술관이란다. 코드4.
호수를 낀 넓은 공원 건너편에 낮은 건물들이 연이어 들어서 있다. 세어보니 대 여섯개 건물이 KODE란 표시를 내걸고. 오늘 오후에서야 그곳이 미술관이란걸 알았다. 도시 가운데에 미술관 건물이 늘어서 있다니 시민들의 품격이 느껴진다. 도시 자체도 멋진데 음악과 미술로 채워진 도시라니 부러울뿐이다.
트롤하우젠에 삼십여 분 트램을 타고 가면서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주택이나 상가 건물이 정교하고 예쁘면서 주변 숲과 잘 어우러진다. 트램에서 내려서 오솔길로 십 오분 정도 걸어가면 그리그 생가, 트롤하우겐이 나온다. 유명관광지인데도 다들 트램을 이용하는 지 자동차를 볼 수가 없고 걸어가는 사람들만 간간히 보인다.
트램을 타면 유모차나 자전거 거치대가 넓게 마련되어 있다. 공용 운송이 편리하다보니 자동차 사용을 덜 하고 그만큼 공기가 깨끗해진다. 시민들이 이런 시스템을 철저히 지키니까 청정도시를 유지하는구나 싶다. 덕택에 아가들을 자주 만날 수 있어 기뻤다.
노르웨이에서는 시니어 할인 우대가 있어 시니어라 말하면 신분증 보자고도 안 하고 바로 할인 티켓을 내어준다. 덕택에 후배도 할인티켓을 받았다. 묻지도 않고 바로 끊어주니.
생가는 10시 반에 관람가능하다고 하여 지도를 보면서 둘러보았다.
그리그의 조각상은 실제 모습 그대로 만들어 놨다. 키가 작은 그를 위해 친구들이 바다를 바라보는 높직한 절벽에 무덤을 조성해주었다.
그리그가 바라보는 바다로 나아가 그리그를 떠올려본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
그리그 생가 관람. 생전에 사용하던 피아노와 바이올린, 거실, 테라스 등.
작은 테라스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싱그러운 초록냄새와 새 소리, 바다를 벗삼아 페르귄트 모음곡을 만들었구나.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가다보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음악을.
그리그 생가를 나와 터벅터벅 걸어 트램을 타고 시내로 나왔다. 숙소에 들어가 잠시 쉬다 나오니 빵빠빠빵~~! 브라스밴드 공연이...
6월부터 관광 성수기에 들어가 이번 주부터 광장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관광 시즌을 알리는 시끌벅적한 음악이 아니라 피아노를 치고 브라스밴드 공연을 보여주고..
베르겐 여름 음악축제가 유명하다더니 오래된 문화의 도시답게 곳곳에서 공연을 펼치나보다. 시끄럽지 않아 마음에 든다.
베르겐 미술관은 건물이 네 곳. KODE1부터 4까지. 코드1인 쿤스트홀에서 입장권을 끊었다. 여기도 시니어 할인. 쿤스트홀에서는 설치 작품이 널직한 룸을 한 개씩 차지하고 있다. 설치 작품의 의도를 생각하기엔 시간이 빠듯하다. 그래도 열심히 참여해보고.
KODE2에 들어가니 뭉크 작품이 엄청 많다. 베르겐 미술관에 뭉크를 비롯 북유럽 작가들과 유럽 미술관 필수 소장작품인 피카소 작품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뭉크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여럿 그렸기에 이제 좀 익숙해졌다. 어머니, 누이, 연인들... 자신의 관련된 여성들의 심리가 그림에 투영. 본인의 고뇌가 그림을 통해 전달된다. 뭉크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며 인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고뇌와 불안에 공감하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아스트럽과 달, 크로그 등이 그린 노르웨이 생활이 나타난 그림들을 보며 이들의 생활을 가늠해본다.
뭉크 자화상.
노르웨이 재력가 이 분이 뭉크를 비롯화가들의 그림을 사 모아 베르겐시에 기증했다고. 19세기 말부터 재력가 몇 명이 그림을 기중하고 시에서는 전용 미술관을 만들어 전시하며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
코드4는 문을 닫았다니 다행이다. 전시 작품이 4만 점이 넘는다니.. 휴우~ 피곤하다. 미술관앞 벤치에 앉아 빵과 음료로 기력을 보충한다.
호수 건너편 언덕위에 집들이 숲과 어우러져 예술품으로 다가온다. 잘 가꾸어진 도심지와 주택가. 인구가 준다고 큰일 났다고 겁을 주는 행정이 아니라, 인구가 적어도 시민 한 명 한 명이 여유롭게 잘 살아가게끔 정책을 펼치는 정부여야 이런 기품있는 도시를 만들겠구나 생각하며.
약국에 들러 크림과 오메가3 등을 구입하려는데 카드가 에러~. 뭔 일이래... 비자카드 사용 한도가 넘었다고 알려준다. 마스터 체크카드는 스톡홀름부터 작동이 안되어 무용지물이고. 카드에 사용한도가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 숙소를 다시 예약하면서 삼백 만원을 넘겨 결재했으니 한도가 초과된거다. 어휴~ 어떡하지.. 침착하게 대처하자 되뇌이며 나를 다독인다.
베르겐에서의 마지막 밤을 카드와 씨름하느라 소진. 한도상향할 방법이 없다. 휴대폰 번호가 바뀌어 선결제도 안 되고.. 은행에 전화걸 수도 없고..
동료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결재를 부탁할 밖에 도리가 없구나. 마음을 돌려먹고 잠에 빠져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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