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연, 35년

정인숙 2013. 9. 26. 22:52

인연, 35

- 정인숙

 

한가위가 지나자 달빛이 은은하게 온 동네를 감싸 안습니다. 사위어가는 보름달을 올려보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을 되짚어 봅니다.

 

어제 윗동네에서 고추를 샀습니다. 처음 시골에 내려올 땐 도농교류의 역할을 해보고 싶었으나, 마음같이 쉽지 않더군요. 도시의 친구들에게 고추를 넘겨주려면 꼭지를 따고 방앗간으로 가져가 가루를 내야하는 잔품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닙니다. 더구나 첫 해엔 일이 서투르니 팔, 다리, 어깨, 허리 온 몸이 쑤시고 저려 다음 날엔 꼼짝없이 눕고 맙니다. 귀촌 삼년 째인 올해는 우리 먹을 고추를 수확하여 갈무리해놓고 여유롭게 두 집 물량만 도와줄 예정입니다.

 

고추를 차에 싣고 나자 아주머니가 고들빼기를 솎아서 가득 넘겨줍니다. 거기다가 부추까지……. ‘으윽 저거 다듬어서 김치 담그려면 죽었다 죽었어! 하면서도 거절 못하고 받아옵니다. 그 마음이 소중하니까요. 우리 마을엔 열 집이 귀촌하여 살고 있습니다. 첫 해에 아이들 아홉 명이 인근 초등학교에 다녔지요. 아침이면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학교가자고 나오고, 엄마들도 함께 아침 등교 길에 동행합니다. 어느 날엔가 집에 오는 길에 한 할머니가 놀다가라며 붙드십니다. 폐 끼칠까 인사만 하고 지나치자 이번엔 머위줄기를 들고 쫓아오시네요. 갖고 가서 해 먹으라고요. 이것을 어떻게 반찬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꽤나 난감했지만, 연세가 아흔이 넘으신 분이 주시니 거절할 수가 없어 받아놓고는 망연자실하던 일도 있었지요.

 

남편은 아침 여섯 시에 닭장 문을 열어 놓고 밭을 대충 둘러보고는 다시 자리에 눕습니다. 여름철에는 새벽에 일을 하야건만, 아직도 ‘nine to five’에 젖어서 한낮 뙤약볕에 무릎을 꿇고 풀을 뽑아내니 동네 분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쓰러지면 어쩌냐고요…….^^.

 

고추 스무 근을 부려놓자 남편도 함께 일을 거듭니다. 둘이 함께 하니 그나마 쉬이 끝내고 이제부턴 고들빼기 다듬기에 들어갑니다. 일단 검불과 시든 잎을 따내고 물에 담가서 흙을 털어냅니다. 다음은 뿌리부분 다듬기……. 이 과정이 가장 시간이 많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아직도 도시습성을 털지 못해서인지 매사 시간을 따집니다. ‘그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이것을 해야 해?’ 고민하면서요.

 

고들빼기를 소금에 살짝 절여놓고 부추를 다듬습니다. 마트에서 파는 부추는 다듬기가 수월하지만, 밭에서 기른 부추는 다듬으려면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닙니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한 일이 오후 두시나 되어 끝났습니다. ~! 처음 담근 고들빼기김치가 맛이 있으려는지…….간단히 점심을 먹고 길게 누웠습니다. 책을 집어 들었지만, 한두 장 넘기고는 스르륵 눈이 감기네요.

 

설핏 잠들어 화양동 골목 한 구석에서 학생들과 손을 놓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던 이십 대의 나를 보았습니다. 아마 6기 졸업식 날이었나 싶네요. 늦은 밤, 동료들과 선술집에 모여 앉아 지나온 일 년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을 훔치던 기억도 스치고요. 소주잔에 스며들던 멕소롱 초록빛깔과 가슴속에 번지는 아픔이 어찌 그리 비슷하던지……. 그들이 졸업하고 삶이 나아지리란 확신을 못해 울었고 무력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술잔만 기울였지요.

 

시골서 살다가 스무 살부터 시작한 서울생활……. 일 년이 못가 나는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서울사람들은 가까이하기가 쉽지 않았고 시골에선 하루 종일 때론 한 달 내내 돈 없이 살아도 어렵지 않았는데 서울살이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기도 힘든 차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우니 심리적으로 한껏 위축이 될 밖에요.

 

자신감을 잃은 마음은 자꾸만 우울해지고 학교공부도 재미없어서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사촌(5기 교사 정의숙)이 성심학교에 가보지 않겠냐고 권했습니다.

 

학교생활이 멀어지고 혼자 책에 몰두하면서 불합리한 사회현실에 어렴풋이 눈이 떠지던 차이기에 선뜻 그 애를 쫓아 나섰습니다. 대학생 교사들과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고 첫 날부터 바로 수업에 투입되었지요. 그날 책상에 앉아 나를 쳐다보던 학생들 눈빛이 떠오릅니다. 지적 갈망과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눈, 나를 저울질하는 눈, 졸린 눈……. 그렇게 발을 들여놓고 그 인연이 35년 흘렀습니다.

 

성심학교와 그 후의 내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지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짬짬이 성심학교를 다니다가 종내는 매일 출근하게 되었고 내 마음도 갈피를 잡아 방에만 콕 박혀 생활하던 습성이 바뀌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늘 웃으며 대해주는 동료들과 나를 따르며 인정해주는 학생들이 있으니까요. 빵 한조각도 나눠 먹으며 노래하고 공부하고 ……. 수시로 엠티 가서 밤새도록 야학의 방향과 교육방식, 학생들과 우리들의 삶에 대해 토론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연하게나마 내 삶의 방향을 잡을 수가 있었지요.

 

대학을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하다 보니 성심학교에서 우리가 시도했던 실험들이 얼마나 값졌는지 깨달았습니다. 명동성당 근처 전진관교육관 수녀님들에게 심성계발훈련을 교육받고 성심 신입생들과 나누며 내가 더 위로받았지요. 살레시오 수련원에서 바디랭귀지를 통한 인간관계 교육은 당시 얼마나 혁신적인 교육 방식이었나요. 수학여행도 참 진보적이었지요. 모두 직접 발표하고 참여하는 행사였으니까요. 공교육에서 행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참으로 많이 시도해보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살아가는 내내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도록 도와주고 힘을 주었지요. 무엇보다도 야학교사생활은 내가 진정 아이들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지, 돈만 받으러 다니는 월급쟁이가 아닌지늘 나를 돌아보고 다시 다잡게 만드는 뼈대였습니다.

 

8312월 어느 날, 우리들은 얼마 전에 시위 건으로 잡혀간 인경이를 걱정하며 자연스레 화양동성당으로 모였습니다. 어떻게 도와야하나 고민하고 우리들이 처한 현실에 울분을 토하면서요. 그날 이종훈선생(7~9기교사)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그 후 나는 임신과 출산으로 야학생활을 못하고 남편이 야학선생이 되었지요. 배부른 몸으로 구의동 성당 지하로 퇴근하여 교실 밖으로 흘러나오는 남편과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나 흐뭇하였던 지요…….

 

성심의 끈이 이어져 온 또 하나의 축이 6기 졸업생들입니다. 졸업 후, 3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반장인 박송옥씨를 비롯하여 김미숙, 김점숙, 조미옥, 이영희, 양은영, 양복순, 변현애, 김춘자..... 이분들과 만나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욕심을 내려놓고 편견을 버리고 마음이 편해지니 아무래도 깨달음을 주는 어른들이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결혼할 때도 찾아와 함박웃음으로 축하해주고, 아이를 낳았을 때도 작은 우리 방에 모여 축복해주던 추억……. 이제 그 아이가 늠름하게 자라나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지나온 세월이 값지고 감사할 뿐입니다.

 

 

성심과 인연을 맺은 것이 35년 지났습니다. 인생의 어느 한 순간 크게 다가온 깨달음은 살아가는 내내 뼈대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오랜 교사생활 내내 나를 붙잡아 주었고 퇴직 후, 잠시 시민단체에 몸 담았을 때나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나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암담해질 땐 늘 화양동 성심학교 작은 교실과 지하실이 떠오릅니다. 그 시절 나를 온통 휘감아 고민하던 어떻게 살아야하는지가 살아나니까요.

 

앞날이 불안하고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열정만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해 방황하던 시기.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젊은 시절. 하지만, 그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성심학교에서의 추억은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해도 늘 달빛이 비추는 것처럼요.

 

은은히 비추이는 둥근 달을 보노라니 오랫동안 잊었던 이름이 떠오릅니다. 춘자, 용로, 길섭, 미성, 정미……. 어디에 살던 성심에서 만났던 인연이 힘으로 살아나리라 믿습니다. 성심을 통해 우린 깨달았으니까요. 배움은 서로 나눠주는 것이고 단 한사람이라도 나를 인정해주고 공감해주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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