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십일 경부터 일거다. 고추를 따서 말리기 시작한 것이.
이른 봄부터 거름을 주어 둔덕을 일구고 넓게 고랑을 쳐서 고추밭을 만든다. 그 위에 비늘을 씌우고 삼십 센티미터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고추를 심는다. 올해는 120개를 준비했다. 흙에다 모판 흙 높이와 딱 맞게 심고 물을 흠뻑 주는 걸로 심기 완료. 모종아, 잘 자라다오... 간절한 마음으로 손모아 합장까지 했다 ^^.
그 뒤 두어 번 거름을 더 주고 줄을 매고 고추보다 더 잘 자라는 풀을 수시로 뽑는다. 남편이 수행하는 자세로 풀을 뽑아대더니 고추 고랑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신작로를 만들어냈다. 동네에서 다들 혀를 찰 정도로.
올해는 약도 쳤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첫 해엔 그냥 풋고추나 따 먹자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막 안겨 주었다. 작년엔 고춧가루를 내보자고 한 것이 탄저병에 걸려 뚝뚝 떨어졌다. 어쩌나... 마음이 아팠다. 간신히 초반에 좀 따고 병든 고추를 도려내고 하여 다섯 근 정도를 수확했다. 올해는 별수 없이 약을 쳤다. 빗물이 튀어서 탄저병이 든다니 비오기 전에 약을 쳐야한다. 날씨를 살피며 약을 쳐서 탄저는 막았는데 구멍이 뽕~ 뚫리는 담배나방병이 걸렸다. 어쩌랴~~ 또 약을 치고...
팔월 들어서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는데 비가 그치질 않는다. 수시로 한바탕씩 쏟아지니 다락방에 전기판넬을 켜 놓고 말리다가 해가 나면 잽싸게 밖으로 내다 말리다... 이러면서 고추를 말렸다. 처음엔 잘못 말렸는지 희나리가 희끗희끗... 워쩐대...
요즘엔 햇볕이 좋으니 이틀이면 마른다. 아참, 그늘에서 이틀정도 숙성을 시켜야한다. 발을 쳐서 빛을 차단한 동쪽 데크에서 고추님을 이틀간 숙성시켜서 거실 앞 데크로 납시게 한다. 방수포 위에 고추를 나란히 널어놓고 그 위에 고추 말림용 부직포를 씌워 놓는다. 한낮이면 거실 창으로 매운 고추 냄새가 더운 바람을 타고 훅~ 밀려온다. 우리에게 그 냄새는 참으로 구수하고 달콤하다. 예전에 몰랐던... 내가 공들인 것이 이리 귀중한 지 새삼 깨닫는다.
고추가 다 마르면 투명해진다. 흔들어보면 구슬이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도 난다. 어떤 이는 보석 부딪치는 소리라고도 한다나. 마른 고추를 걷어 비닐봉투에 차곡차곡 담는다. 한 봉투, 두 봉투, 세 봉투... 오늘은 고추꼭지를 땄다. 일단, 고추가루를 내보고 싶어서다. 음악을 들으며 고추꼭지를 따자니 혼자 생각에 빠져 옛날 유년 시절 일이 엊그제 일인냥 생각난다.
집 안팍으로 멍석을 펼쳐놓고 고추를 말리던 여름 날... 밖에서 놀다가 저녁 어스름이면 집에 들어와 멍석 한 개씩을 걷어야 한다. 멍석 걷으라는 소리, 빨리 들어와 밥 먹으라던 소리도 함께 들린다. 비가 오면 안방은 고추차지가 된다. 한 여름에 불을 때서 뜨듯한 방 안에 고추벌레가 기어다녀 소리 지르곤 했지. 한번은 고추 널어놓은 안방에 도둑이 들어 괘종시계와 장농 안의 옷들이 사라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서울서 사온 내 원피스가 없어졌을까봐 얼마나 걱정했던지.
농사일을 거두노라면 예전 생각이 많이 난다. 돌아가신 엄마가 일하던 광경이 고스란히 머리속에서 그려진다. 중학교 다닐 때, 친구네 집에 다녀와서 엄마에게 말했었다. 나는 학교 선생님하고 남편은 농사짓고 하면 좋겠다고 ... 개네 새언니가 선생님이고 오빠가 농사 지었으니까. 그때 우리 엄마가 웃으며 '그러렴, 농사도 잘 지으면 잘 살고 재밌어' 하셨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십 년 후에 결실을 맺었네. 뒤늦게 농사 일을 거들다니. 우리 엄마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뭐라 하실까 궁금해진다. 아마 일을 못한다고 폭풍 잔소리를 하실테지 ㅎㅎ.
엄마가 꼭지를 딸 때 나던 '톡, 톡' 소리가 들린다. 오케이 합격!
비닐봉투 한 개는 다시 햇볕에 투하. '톡톡' 소리가 나지 않아서다. 조금 더 말리고 꼭지를 따니 소리가 명쾌해진다.
동네 방앗간으로 갔다. 주인 아저씨가 고추농사를 잘 지었다고 하시며 햇볕에 말려 색깔이 곱다 하신다.
가루로 빻아 무게를 재니 5키로가 나왔다. 에구~ 우리 먹으려면 약간 부족한디... 앞으로 남은 고추에서 다섯 근 정도 나오려나...
남편이 약간 실망하는 눈치다. 꽤 나올거라 잔뜩 기대했으니... 그리고 이게 얼마어치냐고 묻는다. 약도 덜치고 온전히 태양볕에 말렸으니 한살림 시세로 십만 원 어치? 하지만,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랴... 봄부터 흘린 땀과 정성이 얼마인데....
고추농사는 남편이 봄부터 흘린 땀방울의 결실이다. 나는 관절과 허리 부실로 밭일을 못하겠어서 심을 때만 겨우 함께 했다. 고추를 따오면 그때부턴 내가 나서서 씻고 말리고 갈무리한다. 그나마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안삼으며. 농사일도 재미있건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쩝!.
아무튼, 올해부터 고추 자급자족 시작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