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기

죽음은 마지막 성장의 기회

정인숙 2009. 4. 1. 20:44

[제3회 행설아 포럼] 어떻게 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
정인숙

http://happy.makehope.org/senior/forum_view.php?&id=363&st=0
봄이 온다. 산수유나무가 왕관 꽃을 수줍게 내밀고 물가의 수양버들은 하루가 다르게 연둣빛으로 변한다. 발을 내딛는 땅 아래에서 생명이 움트고 나무마다 새순을 틔우려 왕성하게 수액을 빨아들인다.


이 봄에 ‘죽음’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최준식 교수(54,이화여대 한국학).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였던가.


“사형수의 비유를 들어보셨습니까? 인도에서는 코끼리에게 받혀죽도록 사형을 시켰다고 합니다. 사형수가 우연히 줄에서 풀려나 도망가는데, 코끼리가 쫓아옵니다. 사형수는 칡넝쿨이 드리워진 우물을 발견하여 내려갑니다. 아래에는 악어가 입을 벌리고, 위에서는 쥐 두 마리가 줄을 갉아먹고 있어요. 


어쩌지 못하고 매달려 있는데, 마침 나뭇가지 위에서 벌꿀이 똑똑 떨어져 입으로 들어갑니다. 꿀에 취해서 사형수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잊습니다.

 

바로 우리 인생을 그리고 있지요. 떨어지는 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돈, 명예, 권력 이런 것에 취해서 얼마나 위험한 지도 모르는 겁니다.”

 

최준식 한국죽음학회장. 누구나 회원으로 환영한다며 한국이 GDP 2만 불이지만, 죽음에 관한 인식은 2천 불 수준이니 인식을 바꾸자고 말한다.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을 우화로 설명하는 최교수는 무겁지 않게 농담처럼 질문하며 다가선다.


최교수는 ‘한국죽음학회’를 4년 전에 만들었다. 처음에 사람들의 반응은 회피와 냉소였다.


“세상에 그런 학회가 다 있느냐?” 고. 시니어, 실버모임에서 죽음에 대해 강의하려면 더 외면하고 배타적이었다.


“죽음만큼 중요한 게 있겠습니까? 죽음 이야기를 꺼내면 재수 없다고 합니다. 죽음에 관해 많이 생각하십니까? 날마다 생각하세요?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는 어느 것이 더 나쁩니까?”


최교수는 청중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고 맞이하는 죽음’이 화제다. 알고 짓는 죄는 참회할 수 있기에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나쁜 것처럼 죽음도 임박해서 생각하면 늦는다고 주장한다.


“4, 50대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추기경이 가시면서 ‘Well Dying'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깨우쳤죠. ‘서로 사랑하세요. 용서하세요’…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용서할 겁니까? 알고 지혜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죽음을 빼놓고 삶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죽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접근한다. 청중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생각하느라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죽음은 마지막 성장의 기회

 

“<인생수업>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음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사후생>에서 전합니다. 그녀는 정신과의사인데, 말기환자들을 상담하면서 죽음에 관심을 가져 세계적인 죽음학자가 되었지요. 병원에서 인간을 육체적 상태로만 취급하여 안타까워하면서요.


혹시 자동차 사고로 순간적으로 공중에서 떨어져 본 적 있습니까? 그때 무슨 생각이 듭니까?” 


“내 삶이 비쳐집니다.”

 

“그렇지요. 죽음은 마지막 성장의 기회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실한 인간으로 마주치는 계기입니다. 지금까지는 일상에서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로‘돈’, ‘남 이야기’ …

 

죽음에 이르면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하며 가장 실존적이고 인간적으로 변하게 합니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최교수는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어린이들에게 인형을 보여주었어요. 애벌레인데, 뒤집으면 나비로 변합니다. 죽으면 또 다른 세상에 이른다는 거죠. 지금 이세상과 다른 4차원의 세계. 

 

먼 곳의 할아버지가 홀연히 눈 앞에 나타났다가 하루 이틀 후에 운명하셨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 보셨지요? 그 세계에 들어가면 마음이 가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사후생의 존재와 심판자가 없다면 인간사회의 윤리가 존재할까요? 죽음과 삶은 떨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죽음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죽음은 부정하고 외면하고 살다가 죽음을 직면합니다.”


이른 봄, 포럼 장에는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아 냉기가 돌고 청중들은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더욱 숙연해진다. 

 


          제3회 '행설아포럼'에 청중 60여 명이 참석하여 '좋은 죽음'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보통 암 말기환자는 어떻습니까. 항암제와 싸우다가 자신을 정리할 기회도 잃어버리고 어느 날 가버립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할 시간도 없이 가버리죠. 또 경제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유교적인 효 때문에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다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떻습니까?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나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 등에서 인간의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맞닥뜨려 어영부영 가지 말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맞이해야지요.”


죽어가는 모습을 영화나 TV에서 많이 접하는 요즘, 사람들은 자연히 영상을 떠올리고 우아하게 죽는 모습을 상상한다.


“드라마에서는 상당히 미화하죠. 실젠 어떻습니까. 병상에서 온갖 기구를 달고 거의 시신과 다름없이 혼수상태에서 지탱합니다.

죽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비가역상태로 가면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존재학적 죽음의 경계입니다. 언제부터 죽음을 준비해야 할까요?”


“비가역상태 전부터요. 현재요.”


청중들은 말 잘 듣는 학생들처럼 대답한다. 어떻게 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유언장을 작성해야죠.”


사전의료지시서를 꼭 기록하자

 

유언장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좋을까. 시신처리, 장례절차, 재산문제, 장묘문제…  최교수는 장례식조착도 ㅇㅇ상조 같은 데 맡기지 말고 자신이 디자인하자고 제안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구하고 아이들은 반드시 참석시키자고 힘주어 말한다. 유언장에는 자필로 서명을 확실하게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쓰라고 권유한다.


“굉장히 실제적인 일, 사전의료지시서를 꼭 기록해야 합니다. 사전의료지시서는 비가역상태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길 원한다는 거죠. 인공호흡, 심폐소생술 등 인공적으로 생명 연장하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의사들은 의무적으로 무조건 살려놔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의사를 밝히면 빼줍니다. 공증을 확실히 받고 자식들에게 계속 공지를 시키세요.”

 

“다음은 마음의 준비입니다. ‘죽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죽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야 합니다. 되도록이면 그 사람을 불러와서 푸는 게 좋죠. 만약 그 사람이 없다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용서하고 풀고 가야죠.


가장 행복한 죽음이 자다가 죽는 거라지만, 성숙한 죽음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화해하고 사랑을 나누고 죽는 겁니다. 항암제에 취해서 정신 못 차리고 가지 말고 마지막에 좋은 이별을 해야지요.”


부모님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하여 크게 소리 지르며 운다. 원불교 소태산 선생은 혼이 위로 빠져 나가야하니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나중에 울라고 가르친다.

 

티베트에서는 죽을 때 <사자의 서>를 읽어주며 빛을 쫓아가라고 일러준다.


“사후에 삶이 있다는 것을 종교적인 측면 말고 다른 면에서 알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환경이 어렵죠. 편안히 살던 곳에서 죽고 다른 삶으로 떠나고 싶어도 관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손님 접대를 할 수도 없고…. 전 세계에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 곳 … 한국뿐이죠.”


짐짓 눈 감고 모른척하던 사실이다. 우리 삶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 문화가 깨졌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병원에서 태어나서, 결혼식은 도떼기시장 같은 예식장에서 15분 만에 후딱 해치우고, 그 다음에 죽음도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쓸쓸하게 죽는다.

 

인생에서 중요하고 성스러워야 할 의식이 마구 짓밟아져 있다.


“영구차 버스 아래 짐칸에 부모님 시신을 모시고 갑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작별을 잘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까?

 

6인실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다른 환자들의 고통은 어떻습니까? 자연사로 갈 수 있도록 존엄사법이 고지되어야 합니다.”


이렇기에 보험혜택을 받는 ‘영면실-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이별할 공간을 마련하자’고 국회에서 추진하고 있다. 존엄사법도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중환자실은 어떤가. 하루 한 시간만 면회할 수 있는 곳. 뜻하지 않게 인공시설에 매달려 연명하느니 확실하게 몇 개월 준비하여 죽음을 맞아야 하지 않을까?


지혜, 사랑, 깨달음과 남에게 베푼 봉사

 

“<이키루>라는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살다’는 뜻입니다. 평생을 시청 공무원으로 살다가 위암말기 선고를 받죠. 처음으로 결근을 하고 ‘왜 내가?’하는 의문에 빠지다가 문득 어떤 민원을 생각합니다.

 

남은 한 달 동안 사람들이 청원한 공원을 조성해 놓고 죽습니다. 이렇게 결국은 남에게 봉사하면서 죽는 게 가장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호스피스병동을 싫어한다. 거기는 죽을 곳이라는 이유다.  최교수는 호스피스 병동은 다른 세계로 가려고 준비하는, 공항의 대합실이라고 비유한다.

 

“의사들은 시신을 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죽을 때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지혜, 사랑, 깨달음과 남에게 베푼 봉사입니다. ‘돈’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최교수에게 죽음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죽음학을 공부하다보니 중요한 것은 ‘여기’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공부할수록 이 세상과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삶과, 인간의 가치가 더욱 절실하게 와 닿습니다.


퀴블러 로스박사는 죽음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되며 이것은 세상의 이웃에 대한 나눔으로 이어지는 동력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순화하고 죽음을 준비해야합니다.

 

서양에서는 종교학과에서 죽음에 대한 교육을 어릴 때부터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시작인데 많이 부족합니다.”


포럼을 마칠 시간이다. 청중들은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문 : 요즘 사고사가 많은데 이런 죽음은 어떻게 맞아야하는가?

답 : 그래서 죽음교육을 해야 한다. 성교육은 어려서부터 하면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죽음교육은 왜 하지 않는지…


문 : 마음의 정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답 : 개별적인 이야기라 사람마다 조금 다르지만, 그 이전부터 계속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죽음 앞에서는 너그러워지고 지혜가 생긴다.


문 : 유교사회와 내세관은 좀 다르지 않을까.

답 : 유교는 현세적이다. 유교는 자신을 통해서 생존하는 간접적인 영생이다. 그러나 영계에 다녀온 사람들은 장례식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 이별, 확실한 이별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마늘밭에 초록 순이 올랐다. 사방에 봄기운이 가득해 보기만 해도 흥겹다. 머지않아 벚꽃이 만개하고 어느 날, 분분히 흩날리리라. 훗날, 또 다른 여행을 떠날 준비할 때, 어느 시인처럼 아름다운 여행이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웃고 즐거워하였다.

내가 내 몸을 떠날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울며 괴로워하였다.

 

덧없는 삶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라.

자만심으로부터 무지로부터 어리석음의 광기로부터 속박을 끊으라.

그때 비로소 그대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리라.

 

생과 사의 사슬을 끊으라.

어리석은 삶으로 빠져드는 이치를 알고 그것을 끊어 버려라.

그때 비로소 그대는 이 지상의 삶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고요하고 평온하게 그대의 길을 걸어가리라.’ - 티베트 <사자의 서>중에서.

 

[글, 사진 _ 정인숙 / 해피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