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가오는 것들

정인숙 2019. 5. 8. 14:01

 

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서 안식할 것이다.

허나 부정하긴 너무 많이, 확신하긴 너무 적다 보니

나는 개탄할 상황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 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 주거나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어느 편을 택할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걸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 <팡세>를 들고 나가 이 귀절을 읽는 50대의

딸, 나딸리. 그녀는 철학교사답게 아주 이성적이다. 때론 감정을 너무 자제하고있는거 아닌가싶을 정도로 그녀 앞에 '다가오는 것들'을 감정에 빠져들지않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어릴 때부터 철학교육, 대상을 왜그렇게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교육을 받아온 프랑스인들에게 철학교사는 선망의 대상이었겠지.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철학교사인게 아주 자랑스러웠다고 말하기도 하니.

 

주인공의 삶을 따라가는 내내 그녀의 상황에 맞는 철학서적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읊어진다. 루소, 호르크하이머, 레비나스, 파스칼 등. 그 구절들을 음미하노라면 화면이 바뀌니 내가 속도를 못쫒아가나보다.

 

영화 첫 장면에 가족들과 여행가서 나딸리 혼자 책을 읽는다. 제목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 앞으로 겪을 시련을 암시하는 글 같다.

 

빛나는 지성으로 출판해내 각광받던 철학책은 퇴물 취급을 받고,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떠나고, 친정엄마는 수시로 자살시도를 행하다가 죽고, 게다가 힘들 때마다 만나는 옛 제자 파비앙 ...선생님이 철학의 길로 이끌어주었다며 고마워하는, 이성의 아들로 삼는 애제자한테서 '선생님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사적 영역에서만 완벽하다'는 말을 듣고 침대에 누워 소리없이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가치있다고 가까이하는 이에게서 비수같은 말을 들었으니 지금껏 버텨오던 둑이 툭~! 무너져버렸겠지.

 

어머니의 죽음앞에서 옛 기억을 회상하며 심란하고 슬퍼지다가 버스 창밖에서 남편이 젊은 애인과 희희낙낙 밝게 웃으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헛웃음을 치며 다시 현실을 깨닫는다.

 

무너질 듯 하면서도 꿋꿋히 내 길을 찾아 나아가는 그녀.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사상보다 중요한 일이다. 딸이 아이를 낳아 보듬는 손길에서 다시 삶의 길이 이어진다.

 

제자 파비앙을 찾아가 산속 공동체 생활을 엿보고 돌아오는 길에 흐르는 OST 음악 'Deep Peace' 만큼 그녀도 평화를 찾아가는 중이다. 파비앙이 저술과 강연, 인세등 최소한의 비용으로 산속에서 공동체 생활하는걸 보니 문득 스콧니어링이 떠오른다. 니어링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군.

 

프랑스의 철학교육과 학생들의 정치참여도를 엿볼 수 있는 영화. '진리는 어떻게 확정하는가'를 주제로 토론하고 글을 쓴다. 인간의 이성을 믿고 사고력대로 행동한다는 나아가는 교육. 젊은 시절 그토록 원하던 교육이건만, 나탈리의 어머니를 보니 그쪽 사회에서 늙음은 정말 추함의 대체어가 아닐까싶게 대책이 없다. 감정을 내비치고 때론 뒤엉켜 살아가는 우리사회가 차리리 낫다싶을 정도로. 허긴 삶에 정답이 어디 있으랴.

 

이젠 먼 남의 이야기로 들리는 교육이야기니 참 나도 많이 변했구나 싶다. 바람이 찬 오월, 햇살이 고마운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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