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늦가을 시 몇 편 인용하다

정인숙 2013. 10. 29. 21:06

<늦가을>김남극

                                           

엄나무 가지 끝에 새가 날아왔다 간다

가시 끝에 앉을 줄 아는 저 새가 불편하다.

흔들림을 흔적으로 남기는 저 새가 불편하다

남을 감자를 캐다 호미로 감자 몇 알 찍는다

속살에 흙이 들어가 까끌거리니 죄를 진 듯 섬뜩하다

꽁깍지와 깻짚을 쌓으니 햇살이 먼저 그 속을 들춘다.

생각보다 먼저 마르는 것들이 남기는 건조함에 손을 넣어본다

서늘한 방바닥에 그냥 누워본다

몸이 자꾸 쪼그라든다

나는 더 작아질 것이고 나는 자꾸 불편할 것이다.

 

내가 엄나무를 알은 것이 겨우 3년 전이다.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나무인데... 저 윗집 길가에 심어져 있어 자꾸 눈이 간다. 봄에는 연초록 새싹이 이쁘다가 여름이 되면 진초록으로 무성해진다. 가을이면 제일 먼저 잎이 다 떨어지고 강한 가시만이 존재를 드러낸다. 그 가시 끝에 새가 앉았구나... 아마 우리 동네에 드나드는 새도 거기 앉았을거다.

 

고훈실 <초록달>

 

"사는 것은

혼자 흔들리다 지는 것이 아니라

초록 동색으로 물들고

물들이며

서로 치대고 나부끼는 것이라고"

 

정수경 <슬픔의 각도>

 

관목과 잡초로 둘러싸인 이즐레뜨 성

두렵고 말라붙은 시간들이 당신을 스케치하고

먼지 쌏인 회전판 위에는

철사로 뼈대를 세워 거푸집을 짓는다

오귀스트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밤은 길었다.

 

손끝으로 더듬어 체온을 느낀다

희미해지는 콧날을 세우고

입술과 귓불을 불러 당신의 흉상을 만든다

사랑은 나를 파괴하는 이글거리는 불꽃

격정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열아홉 살이었다.

 

당신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장난 나침판처럼 흔들렸다

그 길은 때때로 망각의 늪으로 이어져갔고

늪의 끝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은 

실핏줄로 흐르던 당신이라는 햇살과 어두움이었다.

붓으로 석고액을 바르고 찰흙을 파낸다 

 

돌가루처럼 떨어지는 한숨을 

석고 틀 안쪽에 비눗물 대신 바른다 

사랑보다 길었던 당신의 그림자가

오직 하나뿐인 나의 바다였을까

바다를 끌어안은 어둠의 깊이는

늘 그렇게 바닥이 없었다

끓는 청동 물로 빈 바다를 채운다

 

맨발로 오귀스트의 바다를 향해 걸어간

나는 까미유 끌로델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당신의 팔에 엉겨도

젖은 몸속에서는 다시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몽드베르그 정신병원 창밖에는

서른세 번째 겨울이

15도 쯤 기울어진 내 슬픔을 기다리고 있다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 글. 까미유의 마음속에 들어간거 같다. 공감도 이 정도 해야 공감이랄 수 있겠다싶다. 

 

 <저무는 강> 민병도

 

옷깃에 몰래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 듯

또 한 해를 내다버리고 빈손으로 돌아보면

  허전한 가슴 한쪽을 가로질러 저무는 강        

 

물에 발을 묻는다고 그리움이 삭겠냐만

지는 해와 강도 함께 떠나보낸 물오리 떼,

         퍼렇게 멍들고 지친 물소리를 닦고 있었다.         

 

어둠 앞에 흔들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불 켜진 낯선 마을로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노래를 뼈에 묻으면 삶도 다만 긴 느낌표       

 

퍼렇게 멍들고 지친 물소리라... 햇빛에 반짝이는 물만 그려지는데...

 

<마음이 흔들릴 때> 김형영

 

천년을 산 나무에

님은 머무시고

거기 맺힌 열매에도

그 열매의 씨앗에도

그 씨앗이 썩어 움트는 새싹에도

님은 머무시니

나무는 신이 나서 흔들리는 거라.

바람 한 점 없이도 흔들리는 거라.

 

때로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온갖 유혹에 흔들릴 때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래, 그래, 흔들리거라.

 

네가 내 안에 머물고

내가 네 안에 머무니

많이는 흔들리지 말고

뿌리 깊은 나무처럼만 흔들리거라.

그것도 잠시만 흔들리거라.

 

여기와 살면서 마음이 흔들리다가도 그냥 포기하고만다. 마음이 굳건해진 것인지 늙은 것인지.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행오다  (0) 2013.11.10
생일  (0) 2013.11.07
아침 산책길에  (0) 2013.10.28
Jay-Jay Johanson - On the Other Side  (0) 2013.10.27
결혼식 스케치   (0) 2013.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