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새벽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린다. '서울에만 비가 오고 김제에는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건대박물관 김제 지역 답사를 떠났다.
다행이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비가 그칠 기세다.
김제에는 금구리, 금산리, 금강리 등 쇠금(金)자가 붙은 지명이 유난히 많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신라 때부터 사금이 채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일제강점기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노다지꾼, 술집, 밥집 들로 김제 동쪽 일대가 북적거리기도 했다. 330년에 백제 사람들이 쌓았다는 벽골제의 크기가 말해주듯, 김제평야가 탁 트여있는 지역이다.
'징게맹개 외배미' - 김제 만경 너른 들'이란 뜻.
견훤석성. 후백제 왕 견훤이 금산사를 자기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중수했다. 견훤은 말년에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신검을 비롯해 양검, 용검 등 아들들에게 붙잡혀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이후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석 달 동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금성으로 도망 쳐 왕건에게 투항하고 자기 아들을 쳐줄 것을 청했다. 왕건이 그의 아들들을 쳐 후삼국을 통일한 지 며칠 만에, 견훤은 번민과 울화로 등창이 나서 여산에 있던 황산사에서 죽었다.
견훤의 비애가 서려있는 금산사에 들어서볼까나.
일주문. 모악산은 큰 산을 뜻하는 엄뫼, 큼뫼에서 비롯되었다. 한자로 어머니의 뫼라는 뜻의 모악으로 큼뫼는 금으로 금산사를 말한다. 온통 평야인 이 지역에서 이 산의 존재가 얼마나 외경스러웠는지 알려주는 이름이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지어졌다. 일중 김충현선생의 글씨라고 관장님이 소개하신다. 정갈하고 힘있는 글씨.
모악산 벚꽃이 유명하다는데... 일주문을 지나 연륜을 자랑하는 벚나무 길을 걸어간다. 시내 건너편에 절이 들어서있다.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저 다리를 건너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금강문의 글씨가 멋들어진다.
금강문으로 들어서자 천왕문이 보이고 당간지주도 보인다.
당간지주. 지대석과 기단 당간을 끼워넣는 홈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보제루를 지나니 탁 트인 절 마당이 드러난다. 작은 운동장마냥 널찍하니 눈 앞이 시원해진다.
회원들이 '와아~!' 하며 감탄한다.
나도 답사를 여러 곳 다니다보니 예전엔 그 절이 그 절이었는데 이젠 확실히 다르게 보인다.
뭐든지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니까...
미륵전. 국보 제62호. 겉보기엔 3층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모두 트인 통층 팔작지붕 다포집. 편액을 각층마다 붙였다. 대자보전, 용화지회, 미륵전. 미륵은 다른 말로 '자씨'라고도 불리고 화림원의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다. 모두 미륵불을 모신 곳임을 뜻한다.
미륵불은 자씨보살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로 부터 56억 7천만 년이 지난 후에 사바세계에 태어나 화림원 안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미륵불이 되고,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하게 된다는...
가운데 미륵입상 - 11.82m, 좌우 보살상 8.79m
석련대. 석조연화대의 준말로 불상을 모셨던 대석을 이른다. 높이 1.67m, 둘레 10m. 보물 제23호.
육각다층석탑. 점판암 석탑으로 검은 색이다. 화강석 기단 위에 육각형의 지붕돌 11매가 올려져 있고
몸돌은 맨 위 두 층에 .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석탑... 섬세하고 단아하다.
노주석. 보물 제22호.
석등. 지붕돌이 커서 불안해 보인다. 보물 제828호.
금강문 글씨와 비슷하다.
금산사에도 계단이 있구나. 여기는 방등계단이라한다. 석종과 오층석탑.
석종.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자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 보물 제26호.
적멸보궁 안에서 본 석종.
금산사를 나오며 낯설은 꽃을 발견했다. 뭘까... 적어두지 않았으니 잊어버렸네....
머리속 기억도 희미해지는 나이에 기억력만 믿고 메모를 해두지 않았으니 어쩌랴...
마음속에 담아 두는 절은 다시 뒤돌아 보게된다. 일주문을 나오면서 벚꽃이 필 때 다시오리라 생각해본다.
귀신사. 믿음으로 돌아간다는 절 이름이다. 종교적 방황을 끝내고 부처님 품안으로 돌아간다는 뜻일까.
신라 대에는 국신사였다가 고려 때 중창하면서 구순사로 바뀌었다가 조선시대에 고쳐 지으면서 귀신사로 지어졌다는 절.
자그마하고 한적한 절이다. 봄날 같지 않게 추운 날씨로 회원분들이 몹시 추워하신다. 나는 옷을 두둑히 입고 와서 그닥 추위를 느끼지 않으니 선견지명이랄까, 아니다. 추위를 하도 무서워하다보니 무조건 껴입고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
대웅전과 달리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그런데 지권인이어야할 손모양이 약간 다르네. 실장님께 물어보니 지권인 손모양도 몇개 된다네요.
요즘 말로 귀요미 사자^^
지금은 귀신사가 작고 한적한 절이지만, 옛날에는 금산사를 말사로 두며 전주 일원을 관장하던 대찰이었단다. 무엇이든 그 명성 그대로 지니려면 정성도 못지 않아야겠지만, 운도 무시 못하나보다.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 시대의 저수지이다. 저수지 남쪽을 호남, 서쪽을 호서라 불릴만큼 호남지방의 큰 저수지이다. 백제 비류왕 때(330) 쌓았다.
수문과 돌기둥. 일제때 벽골제가 헐리면서 긴 제방과 돌기둥만 남았다.
벽골제에 쌍룡이 왜 있을까 하니.... 벽골제 부근에 백룡과 청룡이 살았는데, 청룡이 성질이 사나와 둑을 무너뜨렸고 마을 사람들은 처녀를 바쳐 청룡을 달랬다고 한다.
그 옛날 신라 때 원덕랑이 김제 태수의 집에 머물며 저수지 보수공사를 감독하였다. 태수의 딸 단야는 원덕랑을 사랑하였지만, 원덕랑은 고향에 약혼녀 월내가 있는지라... 월내가 원덕랑을 만나러 김제로 왔을 때 청룡이 성을 내어 둑을 무너뜨렸다. 김제 태수가 월내를 제물로 바치려하자 단야가 스스로 제물이 되어 벽골제에 뛰어들어 청룡을 달랬다고 한다.
그 이후 마을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소재로 쌍룡놀이를 한다고.
조정래 문학관에 들어섰다. 근현대사를 소설로 알려준 작가, 조정래. 나도 태백산맥을 필사해볼까 하고 한 장 정도 썻던 기억도 난다. 문학관 안에는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을 집필하면서 사용한 집기들과 원고, 가족사진들로 빼곡하다. 방대한 작품 아리랑을 쓰기 위해 하와이로 연해주로 멕시코로 쿠바로 드나들던 여정을 보여준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군산항에 모여 불안감속에 한가닥 희망을 품고 각지로 떠나는 사람들... 그 아픔을 절절하게 보여준 작품. 우리 시대의 귀한 작가. 인간의 능력을 원없이 보여준 작가이다.
나의 젊은 시절에 사상을 풍요롭게 해준 사람, 조정래 작가.
망해사는 절 아래가 바로 바다이다.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지점.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절'.
백제 의자왕 때(642) 부설거사가 창건.
승탑 네 기가 먼저 눈에 띈다. 옛 건물로는 낙서전만. 그나마 문이 닫혀있다.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진다.
바다는 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다. 흐린 하늘, 을씨년스런 날씨... 모두들 움츠리고 발길을 돌린다.
여기서 군산까지는 30여분. 군산휴게소로 남편이 마중을 나온단다. 야호! 피곤이 한방에 날아간다.
군산휴게소에서 남편을 만나 따뜻하고 편안하게 집으로 고! 전라도는 여러모로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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