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제주올레길5코스]남원 ~ 쇠소깍

정인숙 2010. 7. 10. 23:57

 

새벽녘 빗소리에 잠을 깼다.

오늘 오전까지 100ml 내린다 했으니...

창 밖을 내다보니 비와 운무에 가려 뿌옇다.

오늘 우도를 걸을 예정이었는데 코스를 바꾸어야겠다.

비가 내려도 미끌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자...

 

 

 

우비까지 단단히 챙겨 나왔으나, 잠깐 비가 뿌리고는 멈추었다.

비가 내려도 걸을 수 있는 안전한 해안가길, 5코스를 걸어본다.

 

남원 바닷가에 시가 걸려있다.

읽으며 걷노라니 시간이 걸린다.

 

<복종>... 27년 전 결혼식장에서 성내운 선생님이 낭송해 주신 시다.

문익환 목사님의 <꿈을 비는 마음>과 한용운 스님의 <복종>을 낭송하시곤 잘 살라는 특별한 주례사도 없이 끝낸 자리.

그 당시에 왜 <복종>을 낭송하셨는 지 의아했었지.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서로가 복종하고 살라는 의미였을까.

성내운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도 오래되었으니 여쭈어볼 수도 없고...

이곳에서 우연히 <복종>을 대하면서 지나온 세월을 되뇌어본다.

 

 

꿈을 비는 마음 / 문익환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놓고
진주같은 꿈 한 자리 점지해 주십사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철들고 셈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서 있어야죠-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 햇살을 타고 날아오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 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 없는 꿈 말이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 자리,
 평화롭고 자유로운 꿈 한 자리,
 부디부디 점지해 주사이다"
 
세월이 지나 다시 찾아보았다.
'밝고 싱싱하고 평화롭고 자유스럽게 살아가기...'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 감사 드리며 습기와 햇볕으로 후덥지근한 길을 걷는다.
 

 

 

 큰엉 산책로. 나무가 우거져 그늘져있어 걷기가 편하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소리뿐.  

 

 마을을 지나다 마주친 정자. 사진 찍지 말라시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할머니.

 

 성게알을 꺼내는 공동 작업장.

 

 

 

 쉬운 길일거라 택하였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길에 끝이 보인다. 쇠소깍으로 들어가는 길.

 

 

민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쇠소깍. 제주의 옛 통나무배 테우가 다닌다.

열시 40분부터 걷기 시작하여 중간에  한 시간 동안 점심을 먹고 내리 걸었는데도 오후 4시 반이 되어야 도착하였다.

포장도로 위를 뜨거운 태양 아래 걷느라 땀 찔찔 흘리며~~^*^. 

 

공항 가는 길에 먹은 고기국수.

끝없이 나오는 돼지고기.

국물이 참 담백하다.

껄렁해 보이는 십대 아이들이 몰려 앉아 코를 박고 먹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한참 웃었다.

 

 

 

김포에 도착하니 두 집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진희가 우리 부부 사진을 찍으라 권하고...

 

힘들었던 시절, 수없이 밤을 새며 이야기를 나누던 단짝 친구와 몇 십년 만에 같이 한 여행. 

현재의 삶보다 과거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며 걸은 사흘 간 여행.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를 잘 이해해주고 인정해 주는 친구와 함께라서 행복했던 여행.

항상 내 편일거란 믿음으로 든든했던 여행.

 

친구야! 아이들 다 키우고 더 늙기 전에 다시 떠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