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역사의숨결]슬픔을 딛고 일어서다 - 수원 화성 답사 이야기

정인숙 2008. 12. 2. 12:20

 

 

역사의 숨결

 

슬픔을 딛고 일어서다 - 수원 화성 답사 이야기

 

어릴 적 상흔은 슬픔과 그리움으로 남는가.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화성 땅을 밟으니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대왕의 마음이 손에 잡힌다. 싸한 아침공기를 가르며 독산성에 오르니 산이 낮고 평지가 넓어 수원 오산 동탄이 사방으로 보인다.

 

  세마정(洗馬亭)이 나무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흰쌀을 말에 끼얹어 씻기는 시늉을 하자 왜군이 이 성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알고 속아 퇴각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곳. 정조가 수원성 축성과 함께 중건한 정자이다.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려

 

‘이 문에 이르러선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到此門來 莫存知解)’는 글귀를 읽으며 용주사에 들어서니 가슴 밑바닥에 숨어있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지였던 곳. 대왕이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려고 다시 일으켜 세운 절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멀리한 채,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두리번거리던 꼬마들이 그려진다. 손을 뻗으면 왕에게 닿을 듯한 너비로 양쪽으로 늘어선 입석은 마치 신하인 양, 낙엽을 조용히 맞으며 예를 갖추어 서있다.

 

천보루. 왕명으로 중창된 절이기에 받침돌이 웅장하다. 대웅전 앞마당이 넓다. 탑은 일부러 대웅전 바깥쪽에 내었을까. 당시 저기 돌기둥에 괘불을 높이 걸고 야단법석을 벌였을 풍경을 그려본다. 수능을 앞두고 있어 그런지 학부모들이 대웅전과 천보루  누각 안에 가득 들어서서 불경을 외고 있다. 자식을 위한 기도로 야단법석이랄까.

 

대웅전 안에서 단원 김홍도를 만난다. 뛰어난 무인이면서 해박한 문인이었던 대왕은 단원 김홍도를 용주사에 머물며 탱화와 ‘부모은중경’을 그리게 할 만큼 가까이 두고 아꼈다지. 탱화의 스님들은 서양인 모습이라 그런지 입체감이 한결 돋보인다. 

 

 범종에 새겨진 삼존상을 살펴본다. 연꽃무늬와 비천상과 함께 사방으로 조각되어있다. 은은히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아버지를 그리워했을 대왕을 생각하니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국보여서일까. 사방으로 촘촘히 막은 창살로 인해 자세히 살펴보기가 어렵다. 조금만 간격을 넓혀놓으면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 날 텐데....

 

 용주사를 둘러보고 잠시 쉬며 눈을 드니 낮게 깔린 흐린 하늘아래 절 지붕위로 낙엽이 느리게 떠다니고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더욱 아름다운 절. 대왕도 바로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마음 한구석에 내려놓고 편안해졌으리라.

 

 보통리 저수지가에 자리 잡은 한정식 집에서 쓸쓸함을 달래려나. 푸짐하고 맛깔스레 나오는 음식이 일품이다. 호박죽, 탕평채, 잡채, 샐러드, 굴 무침... 언니들에게 각종 음식의 조리법을 물어가며 음미한다. 그 모든 것보다 단연 인기는 된장에 박은 깻잎이다. 그 감칠맛이란...... 전통음식을 먹으면 모두 한 마음이 되니 이상도 하지.

 

저수지 주변 산에도 가을이 머물고 있다. 은은히 어우러진 가을 색깔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눈물이 배인 길

 

 융건릉으로 향한다. 숲 속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니 노송이 늘어져있다. 흙 길은 솔잎이 쌓여 부드럽고 낙엽 밟는 소리가 바스락거린다. 대왕의 눈물이 배어있을 이 길이 후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다. 융릉.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 능이 저 멀리 보인다.

 

 홍살문을 지나 배위에 올라 세 번 참배하는 정조를 떠올려본다. 왕이 걷는 참도 옆 배석이 넓게 깔려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참배하려는 대왕의 마음이리라. 상석과 망부석, 석마, 문인석 무인석 등 석물보다는 봉분에 치중하여 아름답게 꾸몄다는데 나무울타리에 막혀 먼 발치에서만 바라볼 뿐이다. 예감. 축문을 태워 묻는, 돌로 된 함이다. 산불을 우려한 옛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건릉으로 돌아나가는 길은 약간 휘어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마치 수목원에 온 듯, 숲에는 소나무 향이 가득하다. 세월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숲길을 밟으며 아버지의 곁에 묻히고 싶어한 정조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양주 배봉산 자락에 초라하게 묻힌 아버지를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는 이리로 옮기며 나라의 기틀을 새로 잡고자 마음을 가다듬었으리라.

 

 능 건너편에서는 아파트 공사로 분주하다. 이렇게 멋진 왕릉과 숲길 옆에 고층 건물을 짓다니...... 자연스럽게 흐르던 하늘과 바람과 물을 막으면 소중한 문화유산과 숲은 망가질 테고 누구의 배만 불러질 것인지. 역사를 음미하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이곳을 아파트 숲 속에 갇혀놓아야 하는지 안타깝다.

 

 

 

 

장엄한 화성 성곽

 

 정조가 융릉을 13번이나 참배하고 머물러서 업무를 보기 위해 지었다는 화성행궁. 신풍루를 시작으로 600여 칸의 건물이 겹겹이 세워진 아름다운 행궁이다. 축성 시 사용한 거중기가 정약용과 수많은 일꾼들을 떠올리게 하며 한 구석에 놓여있다. 대왕의 명으로 완성된 무예24기는 매일 11시에 실시한다고 하여 아쉽게도 관람을 미뤘다. 눈물과 슬픔을 딛고 강한 나라를 일으키려는 대왕의 의지가 무예에서 드러날 것이라 여겨진다.

 

 서장대에 올라 성곽을 걷기 시작한다. 목적지는 동문인 창령문 까지다. 돌과 벽돌을 적절히 교차하여 쌓아 올린 성곽 안에는 옛 도시 모습이 펼쳐지고 성 밖으로는 고층건물이 멀리 보인다. 지나온 길이 아쉬워 돌아보니 밖으로 돌출한 치성과 성곽, 단풍이 조화를 이루어 우아하면서도 장엄하다. 저 앞에 옹성으로, 이중의 방어벽을 갖춘 웅장한 장안문이 저녁 햇살에 빛난다.

 

 장안문을 앞에 두니 견고한 성곽 안에 행궁을 확장하여 새로 짓고 이곳에서 개혁 정치의 꿈을 실현하고자 한 대왕의 의지가 느껴진다. 오늘,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슬픔과 그리움을 딛고 굳건히 일어서는 한 인간을 가까이 대해보니 대왕의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워진다.

 

 

 

 

 

 화성축성공사나 무예24기 등 모든 과정을 기록물로 남겨 더욱 빛나는 지도자.

200여 년 전, 우리에게도 자랑스러운 지도자가 있었다는 뿌듯함으로 오늘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린다.

 

*11 6, 건국대 박물관 답사팀의 일원으로 수원 화성일대를 돌아보았다.

<꽃들>편집위원 정인숙 isuk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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