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온 자원 활동가, 새로 부임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알빈 파란타 신부, 이주민들의 어머니 미켈라 산티아고 수녀.
“Thank you"와 ”Good bye" 를 연이어 주고받으며 주택가 골목을 돌아 나오는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낯선 이국에서 힘든 노동을 내려놓고 편히 모일 수 있는 공간, ‘이주노동자사무실필리핀공동체’를 나서며 필자는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분분히 날리는 벚꽃 잎들이 왜 그리 서글프게 느껴지는지...
천주교서울대교구에서 마련해준 필리핀 공동체는 한성대 입구역 주택가에 위치한 4층 건물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늑함보다는 일처리에 분주한 모습이다.
영등포에서 시작된 봉사의 삶
이곳의 대모인 미켈라 산티아고 수녀가 반갑게 맞으며 한국에 새로 부임한 알빈 파란타 신부, 필리핀과 한국인 자원 활동가를 한국말로 유창하게 소개한다.
미켈라 산티아고 수녀는 한국전쟁 직전 1956년에 한국에 파견돼 영등포빈민촌에서 배고파 우는 아이들을 위해 미군부대에서 빵과 우유를 얻어다 먹였다. 그 후, 영등포 시립병원에서 빈민 환자들 곁을 지켰고 마산에서 여공들을, 영등포 신길동에서 버스 안내양들을 교육시켰다.
50년 동안을 한국에서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어루만지며 봉사한 공로로 지난해 일가상(사회공익부문, 가나안농군학교제정)을 수상하였다. 그 당시, 남에게 알려질까 부끄러워하던 모습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공동체 생활의 현 상황을 알린다.
그녀는 1991년부터 줄곧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 곁을 지키고 있다. 자그마한 몸피이지만, 오랜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낙천적인 성격과 적극적인 추진력이 돋보인다. 신앙과 어우러져 낯선 사람도 곧바로 자신의 일로 끌어들이는 강인한 힘이 있다.
한국에서 절대빈곤이 사라질 무렵, 필리핀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주해왔다. 현재 필리핀 이주 노동자는 합법적으로 3만6천5백여 명, 불법 취업자는 1만4천5백여 명으로 총 5만1천여 명에 달한다고 파란타 신부가 통계표를 보여준다.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민자들의 쉼터
이 공동체는 1997년에 개원하여 노동자 상담 및 보호소 역할을 한다. 직장 알선해주기, 산재처리하기, 체불임금 및 퇴직금을 받기 위해 관계기관에 진정하는 일, 환자가 생기면 무료로 진찰 받을 수 있도록 중재하는 일 등 한국문화에 낯설고 한국어를 정확히 구사할 수 없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저녁마다 노동자들 수십 명이 이곳으로 찾아온다. 이들은 밥을 나누고 모임을 가지며 이국에서의 고된 노동을 달랜다.
1층은 노동자들의 쉼터로, 2층은 사무실 및 종합공간으로, 3층은 3월말까지 결혼이민자들 쉼터로 쓰였고, 4층은 필리핀 신학생들이 생활하고 있다.
3월까지는 결혼생활 중 도망쳐 나온 필리핀 여성들의 쉼터 역할까지 하느라 이 공간이 북새통이었다. 다행히 ‘결혼이민자가족지원쎈타’의 개원으로 3층에 거주하던 여성들이 옮겨갔다.
마침 한쪽 구석에서 한국인 자원 활동가가 진술서를 번역하다가 이혼청구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농촌에서 살림과 농사 일, 과도한 시집살이 등 문화적으로 적응하기도 어려운 데, 한국인 남편의 폭행 및 알코올 중독, 인간적 학대와 무시 등으로 아들을 데리고 도망 나와 이혼을 원하는 내용이었다.
후원자인 강로사 자매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지...”라며 분노한다. 덧붙여 “우리가 어려울 때, 여기저기에서 후원금을 얻어와 우리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분인데, 우리가 살 만하니 갚아야 도리 아니겠어요?”하며 얼굴을 붉힌다.
반찬 한 가지 식사마저 종종 끊겨
현재 공동체 살림은 노동자들 회비로 운영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비상기금이 필요하지만, 저녁마다 몰려드는 식사 준비도 벅차다 .이곳의 한 달 살림살이 비용이 공과금을 포함해 350만 원 정도. 늦은 밤 청량리 시장이 파할 무렵, 싼값으로 야채를 받아한 끼에 반찬 한 가지로 식사를 하지만, 종종 쌀이 떨어져 종사자들을 애타게 한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한국인들이 도와주어 고맙고 기쁘다. 작년에 집이 더러워도 공동체 식구들 먹고 사느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 로사 자매의 도움으로 도배 및 수리를 하였다.”
노 수녀는 “환자가 생기면 도티병원에서 무료로 진료를 해주고 적십자 병원에서는 일정분의 기금으로 치료해주고 성가병원 및 성바오로 병원에서도 값싸게 치료를 해준다”며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잊지 않는다.
축제와 만남의 장인 일요일 미사
필리핀 노동자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1시 30분에, 혜화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필리핀 장터와 축제장을 이룬다. 매주 2천 명 정도가 모여 미사를 드리는데, 대부분이 이 쉼터를 이용한다. 필리핀에서는 종교의식을 축제와 만남의 즐거운 잔치를 벌인다. 한국의 엄격한 종교의식과 달라서 종종 오해가 생기는데, “필리핀 문화를 이해하고 필리핀 남자들의 기질을 발산하도록 해야 해요”라며 파란타 신부는 이해를 바란다.
낯선 나라에서의 고된 일과에는 스트레스가 따른다. 이곳에서는 각종 동아리 활동을 지원하여 현재 15개의 스포츠 동아리가 활성화하고 있다. 다혈질인 열대지방 사람들의 특성상 꼭 필요한 활동이므로 각 기업체나 종교단체에서 연계하여 지원해 주어야 할 듯싶다.
앞으로의 바램을 묻자 산티아고 수녀는 연세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빠르게 3층으로 안내한다.
여성들의 쉼터로 쓰이던 3층은 현재 어수선하다. 이곳의 벽을 헐어 사오십 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드는 비용이 6백만 원. 독지가의 도움으로 1백만 원은 마련되었으나, 나머지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도움을 호소한다.
방과 거실 사이의 이 벽을 헐어 모임장소를 만들려고 하나, 비용이 부족하다.
건물 출입구 및 각층의 푯말을 찾을 수가 없어 물어보았다. “매일 몰려드는 사람들 먹이고 각종 일 처리에 바빠 신경 쓰지 못해요. 전국에서 발생하는 일이 무척 많아요”한다. 다른 NPO단체들의 예쁜 간판처럼 이곳에도 한국인의 정성이 깃든 표지판이 붙으면 한결 빛이 날 듯 싶다.
건물입구의 희미한 간판. 찾기 쉽도록 새로운 간판이 필요하다.
다문화사회로 가는 첫 걸음
서울교구에서 주거지를 마련해주었지만, 기본 공과금등 자립으로 이끌자니 힘겹다.
고정적인 후원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나,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다. 아직 법인으로 등록이 되지 않아 후원자들이 세제 혜택을 받지 못해 직접 후원자가 매우 적다. 이곳과 같은 공동체와 후원자 모두를 이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경제적인 후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다른 문화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다문화사회로 가는 첫 걸음은 무엇일까.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그 문화를 함께 즐기는 일이 아닐까.
한국인이 회피하는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 이제는 그들이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행복하게 나누여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이주 노동자는 더욱 늘어나서 우리의 삶 가까이에 다가올 터인데, 우리는 여전히 단일 민족을 자랑하고 한국인의 우수성만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때다.
[글/사진_정인숙_해피탐사단]
이주노동자사무실필리핀공동체
주 소 :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1가 115-9(필리핀공동체)
전 화 : 010-4441-0870
E-mail : alvin-parantar@yahoo.com
참조홈페이지: http://www.nodongsamok.or.kr/
후원계좌 : 국민은행 090-24-0592-780 미켈라산티아고 |